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(문단 편집) === 2차대전과 말년 === 1938년 팔켄하우젠은 재복무하여 1940년 벨기에 군정사령관이 될 때까지 서부국경에서 복무하였으며 보병대장까지 진급한다. 1940년에서 1944년까지 벨기에 군정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유대인에 대한 법령을 시행하여, 유태인 28,900명을 추방했다. 또한 반유대정책으로 일자리를 잃은 유태인 2,250여 명을 [[지크프리트 선]] 건설에 투입했다. 또한 점령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수백 명이 독일군에게 총살당했고, 벨기에 사람 약 43,000명 역시 수용소로 추방되어 13,000명이 죽었다.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 직후 [[에르빈 폰 비츨레벤]]과의 친분 때문에 티롤의 수용소에 투옥되었고, 이후 다하우로 이송되었다. 1951년 브뤼셀에서 열린 재판에서 [[첸쉬링]][* 钱秀玲, '중국판 쉰들러'라고 불리는 할머니로 벨기에의 유대인들을 구출했다.]의 증언 등이 있었으나, 유대인 25,000명을 추방하고 레지스탕스에 대한 보복으로 인질을 처형한 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중노동형 12년형을 선고받았다. 하지만 [[콘라트 아데나워]]에게 도움받아 3주 후 석방된다. 1950년, 팔켄하우젠의 72번째 생일에 장제스가 '중국의 친구'라는 이름으로 12,000달러를 보냈으며 1958년 11월 28일, 중화민국 정부는 팔켄하우젠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. [[파일:팔켄하우젠서훈.jpg]] 1966년에 87세로 사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